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오츠카 에이지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가 [[만주]]에 전재산을 두고 돌아왔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가난하게 성장했다. 이 아버지는 한 때 [[일본공산당]]의 당원이었으며 아버지의 사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본인은 뼈 속까지 전후민주주의자이기 때문에 작품에서 [[좌파]] 사상이나 [[공산주의]]가 다루어질 경우는 [[미화]]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루되 지나칠 정도로 까지는 않는다. 아마도 아버지를 연상하기 때문인 듯. 중학교 시절에는 만화동호회에 입회했으며 그 연줄로 고등학교 1학년때는 [[만화가]]의 [[어시스턴트]]를 맡게 된다. 다음해 그 만화가의 소개로 데뷔. 이런저런 잡지에서 개그만화를 연재하지만 대학수험과 본인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두고 말았다. 츠쿠바 대학교 시절에는 [[민속학]]을 배웠으며 이 때의 경험이 후에 작품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지도교수가 야나기다 쿠니오의 직계 제자였던 탓에 교수 중에 한 명이 야나기다의 사상에 대해서 회의적[* 그도 그럴 것이 야나기다는 개혁이랍시고 일본전통문화를 박살낸 [[메이지 유신]] 후에 일본의 민속학을 정립시킨 민속학의 거물로 필드워크 중시의 학문사상으로 중요한 발견을 수없이 해낸 대학자였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빠지던 일본정부와 협력하여 일본내 소수민족문제나 [[동성애자]], [[부라쿠민]] 등의 피차별계급등에 대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은폐했다. 그러니 골수 전후민주주의자였던 오오츠카는 그런 야나기다가 아니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인 오오츠카에게 민속학을 그만둘 것을 권하였고 오오츠카도 이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제간의 사이가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었는지 후에 오오츠카의 작품에 대해서 듣게 된 지도교수가 몇 마디 호의적인 말을 전했다고 한다.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오오츠카는 한 때 일한 만화업계로 돌아가는데 작가였던 경험을 인정받아서 아르바이트 편집장이라는 묘한 직책에 올려진다. 이 때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담당을 맡은 적이 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며 만화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배운 좋은 경험이었다고 한다. 정사원이 된 오오츠카는 여러 곳에 얼굴을 내밀게 되는데 이 때부터 논평가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한다. 후에 함께 일하게 되는 후지와라 카무이, 아내가 되는 시라쿠라 유미 등과 만난 것도 이 시절. 또한 《[[강식장갑 가이버]]》의 편집을 맡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순조롭게 레벨업을 하다가 전업, 잡지사의 폐간 등을 거쳐서 독립하였고 만화 원작자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본인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있어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올려서 작품은 [[게임판]], [[애니메이션판]], [[소설판]] 등 다양한 [[미디어 믹스]]로 분화되었고 작품의 권리가 더 이상 혼자서 관리할 수 없을 만큼 되자 자신의 작품을 관리하는 사무소를 차리게 된다. 가끔씩 스토리 전개가 막힌 작가 대신 스토리를 써주거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등의 업무도 맡고 있다. 만화에 있어서의 분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그의 사무소에는 그림 담당, 스토리·아이디어 담당 등이 있다. 나름대로 실적을 쌓으면 자신의 연줄을 써서 만화 연재를 밀어넣어주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